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한 이유
24 Dec 2017 | Japan
여러 지인이 추천한 올해의 책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였다. 요지는 이렇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이 선포된 지 40여 년만에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열강의 대열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일본이 순식간에 그런 기적을 일궈냈다고 보는 건 오해다. 17세기 초반 에도 막부 성립에서 19세기 중반 메이지유신 이전까지 에도시대 260여년동안 권위와 시장 간의 긴장, 경제의 분화와 전문화, 인적/물적 이동성의 확대 등 드라마틱하고 익사이팅한 축적을 거쳐 포텐이 터진 결과다.’
저자는 20여 년 간 외교관 생활을 하다가 한일관계에 기여할 수 있는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외교부를 그만두고 최근 서울에서 우동집을 하고 있다. 독특한 저자 이력만큼이나 책 제목도, 논지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다소 일본 중심적인 시각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나라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일본 역사’라는 느낌도 들지만.. 인상적인 구절 몇 개 정리해본다. (2017. 12. 24. 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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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에도시대의 일본은 임진왜란 때 납치한 도공이나 조선통신사에게 한 수 배우며 선진 문물을 습득한 문명의 변방국이다. 고대 중화문명 확산 경로의 선후관계에서 비롯된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은 에도시대로까지 자연스럽게 연장되고 고정관념화되어 있다. 단언컨대, 일본의 근세 260여 년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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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보청의 묘미는 국가에서 거두는 국부(國富)가 고스란히 인프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쇼군이 중앙의 군주로서 징세, 즉 화폐나 현물의 형태로 생산량의 일정 부분을 거두어 갔다면 그 과정에서 많은 비효율과 왜곡된 자본 축적/잉여가 발생하였을 것이다. 일본은 천하보청에 따라 세금 징수가 아니라 ‘결과물’ 형태로 의무를 부과했기 대문에 관리비용 등의 매몰비용(sunk cost)이나 착복으로 인한 증발 없이 모든 투입이 실물 인프라로 이어졌다. (중략) 현대 경제학으로 말하면 승수효과가 매우 높은 재정정책이 절묘한 타이밍에 시행된 것이다. (중략) 말단에서 세금의 형태로 걷히는 생산물은 천하보청을 거치면서 노임, 자재 대금 형태로 재분배되었다. 이러한 직접적인 자원 투입의 결과로 높은 수준의 공공인프라가 창출되자 한층 더 경제활동이 촉진되고, 이는 다시 말단 세금 납부자의 생활 개선으로 이어졌다.
* 천하보청(天下普請) : 쇼군이 다이묘들에게 부과하는 공공사업 역무(役務). 에도 막부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아스는 에도성, 하천 정비 및 농수로/운하망/상하수도 건설 등 인프라 건설에 다이묘들을 동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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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근교대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 적게는 100명에서 많게는 500명 이상의 대규모 인원이 수백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이동하는데, 소요되는 비용은 전적으로 다이묘가 부담해야 했다. (중략) 가장 큰 혜택을 본 것은 교통, 숙박의 요지와 에도, 오사카 등 대도시의 상공인과 노동자였다. (중략) 많은 천하보청이 참근교대와 연계되어 시행되었다. 참근교대에 수반하여 고카이도(五街道)라 불리는 간선도로가 대대적으로 확충되고, 에도성을 비롯한 도시기반 건설에 필요한 자재의 운송을 위하여 해로와 수로가 정비되었다. 18세기 초엽에 미곡을 비롯한 각종 물자의 집산지인 오사카로부터 에도를 연결하는 복수의 민영 정기항로가 개설되었고, 18세기 말엽에는 전국을 연결하는 상업 해운망이 완성되었다. 해운망의 발달은 미곡, 술, 간장, 각종 생필품, 지역 특산물이 오사카로 집산되었다가 에도에 공급되면서 전국적으로 유통되는 데 기여하였고.. (중략) 다이묘라는 재향 지배층의 의무적 소비 지출 증가가 상인 및 도시노동자 계층의 소득으로 흡수되는 현상은 현대적으로 말하면 일종의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가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 참근교대제(參勤交代制) : 쇼군이 모든 번(藩)의 다이묘들로 하여금 1년 단위로 정기적으로 에도와 그들의 영지를 오가게 하는 일종의 ‘인질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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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게리아겐고와게에는 ‘handkerchief’가 하나후키로 번역되어 있다. 한국말로 하면 ‘코닦기’ 정도의 의미이다. 일본에는 없는 물건이지만 그 용도를 파악하여 적절한 대역어를 조어한 것이다. 이보다 더 관념적인 단어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liberty’를 자유(自由)로, ‘economy’를 경제(經濟)로, ‘physics’를 물리(物理)로, ‘chemistry’를 화학(化學)으로 번역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에 없는 관념을 번역하기 위해 사전의 편찬자들은 서양의 개념을 수용한 후 그를 자국어로 변용하는 언어의 재창조 작업에 몰두하였다. 최초로 그러한 임무가 맡겨진 사람들 입장에서는 단어 하나하나가 문화의 충돌이었고 문명의 이양이었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번역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일본의 근대화에는 서구의 관념을 일본의 관념으로 변환시키고 내재화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개항 이후 이루어진 일본의 급속한 근대화는 그보다 100년 전 부터 수많은 지식인들의 고뇌가 담긴 ‘언어의 통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최초의 영일사전은 1814년 일본 막부 주도로 만들어졌다는 점 언급) (중략) 참고로, 최초의 영한사전은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집필한 ‘한영 영한자전’이다. 조선에는 마땅한 인쇄시설이 없어 1890년 요코하마에서 발행되었다. (괄호 안 및 강조표시는 인용자)
* 안게리아겐고와게(諳厄利亞言語和解) : 1811년 나가사키에서 만들어진 영어의 기본체계와 기초 어휘가 정리된 책자(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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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그 부당한 처사(불평등 상호 조약)를 영국에게 당했고, 일본은 미국에게 당했고, 조선은 일본에게 당했다. 한국의 역사 교육은 이러한 불평등의 강요가 얼마나 천인공노할 짓인지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강요의 주체인 일본의 정의롭지 못함과 무도함을 밝히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삼는다. 그것은 그것대로 각국의 가치관과 교육관에 따라 그럴 수 있다.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구미 열강 세력에 당한 불평등에 대해 분개하고 분노한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 교육은 거기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유럽으로부터 불평등한 조항을 강요당한 것은 일본의 사법제도가 그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탓이다. 그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사법제도를 구축하고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 당시 일본의 위정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1854년 개국 이래 불평등조약의 개정은 일본 사회의 지상과제가 되었다. 내로라하는 뜻있는 지식인들이 구미로 건너가 그들의 법제를 습득하고 외국의 전문가를 초빙해 지도를 청하고 국가 지성의 총력을 기울여 법제의 근대화에 매진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880년 형법과 형사소송법 제정을 필두로 1889년 헌법, 1896년 민법 등 소위 ‘법전’이라 불리는 6법 체계가 완성되었다. 유럽의 법제를 철저히 연구하여 제정한 법률들이다. 유럽국들이 더 이상 법체계의 이질성, 미성숙성을 이유로 불평등을 강요할 수 없도록 준비를 단단히 한 일본은 당당하게 기존의 불평등 조항의 파기와 개정을 요구한다. 일본 정부는 1892년 포르투갈의 영사재판권을 포기시키고, 1894년 청일전쟁의 승리를 기화로 영국을 강하게 몰아붙여 기존의 불평등조약을 개정한 ‘일영통상항해조약’을 체결하고 사법 주권을 회복하였다. 유럽세력의 좌장인 영국과 조약을 개정하면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이다. 20세기가 되기 전에 일본은 구미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사법 주권을 회복하였다. 불평등조약을 강요당한 분함을 계기로 대등한 관계로 인정받겠다는 집념이 기어코 불평등조약의 폐기를 이끌어냈고, 그러한 굴욕이 오히려 조기 근대화의 자극제로 작용한 것이다. 이러한 집단 지성 축적의 스토리와 그 기틀을 닦은 지식인들의 고뇌와 성취의 에피소드가 후세에 전해져 일본인들의 역사관과 세계관을 형성하였다. 일본인들은 그렇게 역사를 바라보고, 가르치고, 배운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깨끗한 설욕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강요당한 불평등을 조선에 다시 강요한 일본을 부도덕하고 악한 나라라고 비판하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일본은 스스로 주권을 회복하였고 조선은 회복하지 못하였다. 그 역사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없는가? 이것이 한국의 역사관이 답을 찾아야 할 올바른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지인이 추천한 올해의 책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였다. 요지는 이렇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이 선포된 지 40여 년만에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열강의 대열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일본이 순식간에 그런 기적을 일궈냈다고 보는 건 오해다. 17세기 초반 에도 막부 성립에서 19세기 중반 메이지유신 이전까지 에도시대 260여년동안 권위와 시장 간의 긴장, 경제의 분화와 전문화, 인적/물적 이동성의 확대 등 드라마틱하고 익사이팅한 축적을 거쳐 포텐이 터진 결과다.’
저자는 20여 년 간 외교관 생활을 하다가 한일관계에 기여할 수 있는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외교부를 그만두고 최근 서울에서 우동집을 하고 있다. 독특한 저자 이력만큼이나 책 제목도, 논지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다소 일본 중심적인 시각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나라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일본 역사’라는 느낌도 들지만.. 인상적인 구절 몇 개 정리해본다. (2017. 12. 24. 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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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에도시대의 일본은 임진왜란 때 납치한 도공이나 조선통신사에게 한 수 배우며 선진 문물을 습득한 문명의 변방국이다. 고대 중화문명 확산 경로의 선후관계에서 비롯된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은 에도시대로까지 자연스럽게 연장되고 고정관념화되어 있다. 단언컨대, 일본의 근세 260여 년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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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보청의 묘미는 국가에서 거두는 국부(國富)가 고스란히 인프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쇼군이 중앙의 군주로서 징세, 즉 화폐나 현물의 형태로 생산량의 일정 부분을 거두어 갔다면 그 과정에서 많은 비효율과 왜곡된 자본 축적/잉여가 발생하였을 것이다. 일본은 천하보청에 따라 세금 징수가 아니라 ‘결과물’ 형태로 의무를 부과했기 대문에 관리비용 등의 매몰비용(sunk cost)이나 착복으로 인한 증발 없이 모든 투입이 실물 인프라로 이어졌다. (중략) 현대 경제학으로 말하면 승수효과가 매우 높은 재정정책이 절묘한 타이밍에 시행된 것이다. (중략) 말단에서 세금의 형태로 걷히는 생산물은 천하보청을 거치면서 노임, 자재 대금 형태로 재분배되었다. 이러한 직접적인 자원 투입의 결과로 높은 수준의 공공인프라가 창출되자 한층 더 경제활동이 촉진되고, 이는 다시 말단 세금 납부자의 생활 개선으로 이어졌다.
* 천하보청(天下普請) : 쇼군이 다이묘들에게 부과하는 공공사업 역무(役務). 에도 막부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아스는 에도성, 하천 정비 및 농수로/운하망/상하수도 건설 등 인프라 건설에 다이묘들을 동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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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근교대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 적게는 100명에서 많게는 500명 이상의 대규모 인원이 수백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이동하는데, 소요되는 비용은 전적으로 다이묘가 부담해야 했다. (중략) 가장 큰 혜택을 본 것은 교통, 숙박의 요지와 에도, 오사카 등 대도시의 상공인과 노동자였다. (중략) 많은 천하보청이 참근교대와 연계되어 시행되었다. 참근교대에 수반하여 고카이도(五街道)라 불리는 간선도로가 대대적으로 확충되고, 에도성을 비롯한 도시기반 건설에 필요한 자재의 운송을 위하여 해로와 수로가 정비되었다. 18세기 초엽에 미곡을 비롯한 각종 물자의 집산지인 오사카로부터 에도를 연결하는 복수의 민영 정기항로가 개설되었고, 18세기 말엽에는 전국을 연결하는 상업 해운망이 완성되었다. 해운망의 발달은 미곡, 술, 간장, 각종 생필품, 지역 특산물이 오사카로 집산되었다가 에도에 공급되면서 전국적으로 유통되는 데 기여하였고.. (중략) 다이묘라는 재향 지배층의 의무적 소비 지출 증가가 상인 및 도시노동자 계층의 소득으로 흡수되는 현상은 현대적으로 말하면 일종의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가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 참근교대제(參勤交代制) : 쇼군이 모든 번(藩)의 다이묘들로 하여금 1년 단위로 정기적으로 에도와 그들의 영지를 오가게 하는 일종의 ‘인질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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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게리아겐고와게에는 ‘handkerchief’가 하나후키로 번역되어 있다. 한국말로 하면 ‘코닦기’ 정도의 의미이다. 일본에는 없는 물건이지만 그 용도를 파악하여 적절한 대역어를 조어한 것이다. 이보다 더 관념적인 단어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liberty’를 자유(自由)로, ‘economy’를 경제(經濟)로, ‘physics’를 물리(物理)로, ‘chemistry’를 화학(化學)으로 번역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에 없는 관념을 번역하기 위해 사전의 편찬자들은 서양의 개념을 수용한 후 그를 자국어로 변용하는 언어의 재창조 작업에 몰두하였다. 최초로 그러한 임무가 맡겨진 사람들 입장에서는 단어 하나하나가 문화의 충돌이었고 문명의 이양이었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번역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일본의 근대화에는 서구의 관념을 일본의 관념으로 변환시키고 내재화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개항 이후 이루어진 일본의 급속한 근대화는 그보다 100년 전 부터 수많은 지식인들의 고뇌가 담긴 ‘언어의 통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최초의 영일사전은 1814년 일본 막부 주도로 만들어졌다는 점 언급) (중략) 참고로, 최초의 영한사전은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집필한 ‘한영 영한자전’이다. 조선에는 마땅한 인쇄시설이 없어 1890년 요코하마에서 발행되었다. (괄호 안 및 강조표시는 인용자)
* 안게리아겐고와게(諳厄利亞言語和解) : 1811년 나가사키에서 만들어진 영어의 기본체계와 기초 어휘가 정리된 책자(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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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그 부당한 처사(불평등 상호 조약)를 영국에게 당했고, 일본은 미국에게 당했고, 조선은 일본에게 당했다. 한국의 역사 교육은 이러한 불평등의 강요가 얼마나 천인공노할 짓인지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강요의 주체인 일본의 정의롭지 못함과 무도함을 밝히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삼는다. 그것은 그것대로 각국의 가치관과 교육관에 따라 그럴 수 있다.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구미 열강 세력에 당한 불평등에 대해 분개하고 분노한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 교육은 거기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유럽으로부터 불평등한 조항을 강요당한 것은 일본의 사법제도가 그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탓이다. 그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사법제도를 구축하고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 당시 일본의 위정자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1854년 개국 이래 불평등조약의 개정은 일본 사회의 지상과제가 되었다. 내로라하는 뜻있는 지식인들이 구미로 건너가 그들의 법제를 습득하고 외국의 전문가를 초빙해 지도를 청하고 국가 지성의 총력을 기울여 법제의 근대화에 매진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880년 형법과 형사소송법 제정을 필두로 1889년 헌법, 1896년 민법 등 소위 ‘법전’이라 불리는 6법 체계가 완성되었다. 유럽의 법제를 철저히 연구하여 제정한 법률들이다. 유럽국들이 더 이상 법체계의 이질성, 미성숙성을 이유로 불평등을 강요할 수 없도록 준비를 단단히 한 일본은 당당하게 기존의 불평등 조항의 파기와 개정을 요구한다. 일본 정부는 1892년 포르투갈의 영사재판권을 포기시키고, 1894년 청일전쟁의 승리를 기화로 영국을 강하게 몰아붙여 기존의 불평등조약을 개정한 ‘일영통상항해조약’을 체결하고 사법 주권을 회복하였다. 유럽세력의 좌장인 영국과 조약을 개정하면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이다. 20세기가 되기 전에 일본은 구미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사법 주권을 회복하였다. 불평등조약을 강요당한 분함을 계기로 대등한 관계로 인정받겠다는 집념이 기어코 불평등조약의 폐기를 이끌어냈고, 그러한 굴욕이 오히려 조기 근대화의 자극제로 작용한 것이다. 이러한 집단 지성 축적의 스토리와 그 기틀을 닦은 지식인들의 고뇌와 성취의 에피소드가 후세에 전해져 일본인들의 역사관과 세계관을 형성하였다. 일본인들은 그렇게 역사를 바라보고, 가르치고, 배운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깨끗한 설욕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강요당한 불평등을 조선에 다시 강요한 일본을 부도덕하고 악한 나라라고 비판하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일본은 스스로 주권을 회복하였고 조선은 회복하지 못하였다. 그 역사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없는가? 이것이 한국의 역사관이 답을 찾아야 할 올바른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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