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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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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기간 이것만은 꼭 읽으리라 다짐했던 책이 하나 있다. 김애란의 5년만의 신작 소설집 ‘바깥은 여름’. 대학 시절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를 읽고 무한 감동 모드에 빠져 있었던 지라 새 작품이 출간됐다는 소식에 무척 기뻤다.

김애란은 5년 전 소설의 주인공들이 현재 맞닥뜨리고 있는 삶의 문제들을 담담하게, 하지만 뼈아프게 그려낸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노량진 어느 편의점, 원룸, 학원을 전전하지 않는다. 결혼도 했고, 애도 낳았고, 집도 샀다.

그러나 빚과 가난에 쪼들린다는 점에서, 이른바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기 위해 아둥바둥한다는 점에서, 그러면서도 상실감이 그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삶은 5년 전과 비교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휴가 기간 책장을 넘기면서 소설의 흡입력과 재미에 감탄하면서도 너무나 현실적인 묘사에 가슴 한 구석이 아리기도 했다. 이 느낌을 잊지 않기 위해 인상 깊은 구절 몇 개를 정리해본다. 2017. 8. 11. 부산

한동안 집이 생겼다는 사실에 꽤 얼떨떨했다. 명의만 내 것일 뿐 여전히 내 집이 아닌데도 그랬다. 이십여 년간 셋방을 부유하다 이제 막 어딘가 가늘고 연한 뿌리를 내린 기분. (중략) 아내는 9급 공무원 시험에 세 번 응시해 세 번 떨어졌고, 공무원이 되는 대신 노량진 공무원 입시학원에서 사무를 봤다. 결혼 후 난임 치료를 받다 두 번의 유산 끝에 영우를 가졌고, 다섯 번의 이사 끝에 집을 샀다. 모두 지난 십 년간 정신없이 벌어진 일들이었다. 아파트를 얻은 뒤 아내는 휴일마다 베란다에서 계속 무언가를 자르고, 칠하고, 조립했다. (중략) 아내는 정착의 사실뿐 아니라 실감이 필요한 듯했다. 쓸모와 필요로만 이뤄진 공간은 이제 물렸다는 듯, 못생긴 물건들과 사는 건 지쳤다는 듯. 아내는 물건에서 기능을 뺀 나머지를, 삶에서 생활을 뺀 나머지를 갖고 싶어했다. ‘입동’

‘딱 한 잔만’ 하자던 술자리는 3차까지 이어졌다. 새벽 세시가 넘었을 즈음 테이블에 남은 사람은 이수와 동오뿐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다. 이수는 동오가 최근 커피숍을 냈다 망한 걸 알고 있었다. 직접 연락하지 않아도 그런 소문은 귀에 잘 들어왔다. 이수는 자기 근황도 그런 식으로 돌았을지 모른다고 짐작했다. 걱정을 가장한 흥미의 형태로, 죄책감을 동반한 즐거움의 방식으로 화제에 올랐을 터였다. 누군가의 불륜, 누군가의 이혼, 누군가의 몰락을 얘기할 때 이수도 그런 식의 관심을 비친 적이 있었다. 경박해 보이지 않으려 적당한 탄식을 섞어 안타까움을 표한 적 있었다. 그 자식 공부 잘했는데. 그러니까 걔기 그렇게 될 줄 어떻게 알았어. 인생 길게 봐야 하나봐. 누구는 벌써 부장 달았던데. 걔가 잘 풀릴 줄 아무도 몰랐잖아. 동일한 출발선을 돌아본 뒤 교훈을 찾고 줄거리를 복기할 입들이 떠올랐다. 그러다 어색한 침묵이 돌면 금방 다른 화제를 찾아내겠지. 어쩌면 다른 친구들도 이미 타인의 삶에 심드렁해진 지 오랜데 이수 혼자 그렇게 추측하는지 몰랐다. ‘건너편’

우편함에 각종 고지서와 전단지가 가득했다. 내 것과 남편 이름이 뒤섞인 종이 뭉치를 가슴에 안고 승강기에 올랐다. 그러곤 현관 앞에 서서 당신 것과 내 생일을 섞어 만든 비밀번호를 눌렀다. 한 달 남짓 집에 고인 미지근한 공기가 바깥바람과 만나 몸을 뒤척였다. 신발장 앞에 캐리어를 세워두고, 우편물을 부엌 식탁 위에 던진 뒤 안방으로 들어가 그대로 쓰러졌다. 고요하고 어둑한 안방에서 ‘우리집 냄새’가 났다. 당신과 같이 만든 냄새였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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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를 둘러싼 정치 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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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기간 ‘그해 역사가 바뀌다(주경철 지음)’를 읽다가 눈에 띄는 구절이 있어서 정리 용도로 그대로 인용해봤다. ICBM과 핵탄두 소형화에 성공한 김정은이 괌 기지를 날리겠다고 위협하고, 트럼프가 북에 대해 괌을 공격하면 누구도 보지 못한 일이 일어날거라 맞불을 놓고, 중국은 그저 미국 세력의 확장을 막으려고 팔짱끼고 있는 가운데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 지형을 역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글이라는 생각에서다. 2017. 8. 11. 부산

강조 표시는 인용자 주, 저작권 등 문제시 자삭하겠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에 들어온 왜군은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군대였습니다. 이들은 강력한 화력에다 사무라이가 함께 운영되는 복합군대였습니다. 그때 들어온 병력 16만명 중 4분의 1이 총을 소지했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 군대는 지역별로 영주가 군대를 모아서 제공했는데, 영주가 부자면 총을 사용하는 사수의 비중이 높고 가난하면 사무라이의 비중이 높은 식이지요.

여기에서 16만명이라는 수치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정말 엄청난 의미를 가진 병력입니다. 한번 비교해봅시다. 거의 같은 시기에 있었던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전투로는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無敵艦隊)의 영국 공격을 들 수 있습니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Felipe II)가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를 징치하겠다고 군사를 총집합해 무적함대에 승선시킨 뒤 영국으로 파송했지요. 이때 스페인군의 인원이 3만 명이 안 됩니다. 이렇듯 유럽 역사를 뒤흔든 중요한 전투에 투입된 인원도 3만 명이 안 되는데 일본군 16만 명이 조선 땅에 들어왔다는 것은 보통 전투가 아닙니다. 그야말로 동아시아의 명운이 갈린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놓고 볼 때 어쨌든 우리가 일본군을 격퇴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맨날 조선 군대가 형편없이 패퇴하고 국왕이 도주했다는 식의 이미지만 떠올리지만 세계 최강의 화력을 자랑하는 엄청난 대군을 물리친 성과는 결코 무시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심지어 산속에 있던 스님들까지도 뛰쳐나와 게릴라전을 벌이지 않았습니까? 명나라에서도 원군(援軍)을 보냈는데, 원군을 보낸 이유는 단지 조선에 대한 의리 때문만이 아닙니다. 만약 저 막강한 일본 군사력이 조선을 정복한 후 보급로를 확보하여 밀고 올라간다면 명나라의 운명도 장담 못 하는 실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의 의미를 다른 각도에서 한번 되새겨봅시다. 일본이라는 강력한 해양세력이 한반도를 통해서 대륙으로 들어가려는 힘이 한반도에서 굴절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대 사례는 없을까요? 그러니까 강력한 대륙 세력이 해양으로 들어가려다가 한반도에서 굴절된 경우 말입니다. 몽골 사례를 들 수 있겠네요. 상대적으로 비교해볼 때 몽골군은 세계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대라고 이야기합니다. 몽골이 서쪽으로 진격해 들어갈 때의 기세를 보면 정말 엄청났습니다. 무엇보다 상대편을 철저히 파괴할 때는 차마 말하기 힘든 지독하게 잔인한 모습을 보입니다.

예컨대 러시아에서 전투가 벌어질 때 몽골이 보인 행태는 이렇습니다. 상대방이 항복을 안 하고 계속 버티다가 성이 함락된 경우, 저녁에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을 땅에 엎드리게 한 후 그 위에 판자를 깝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몽골군은 밤새 술을 마시고 놉니다. 승자는 위에서 술을 마시고 패자는 그 아래에서 압사당하는 것이지요. 아침에 판다를 걷어보면 모든 사람이 죽어 있습니다. 그러고는 이 지역에 불을 질러 모든 것을 다 태워 없애버리고 떠납니다. 자신들에게 저항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일부러 과시적으로 보여서, 다음 번 적들이 그 소식을 듣고 아예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는 의미겠지요.

이토록 강한 세력이 고려로 진격해옵니다. 우리는 오래 버티고 항전하지만 결국 몽골에게 사위의 나라가 된다는 명목으로 그들의 지배를 받기에 이릅니다. 그 후 몽골은 고려를 움직여 해군을 만들어서 일본을 징벌하겠다고 나섭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 공격은 실패로 끝납니다. 왜 실패했을까요?

태풍 때문이라고들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해 카미카제(神風, 원래 13세기 몽골의 일본 침공시 몽골 함대를 침몰시킨 태풍을 뜻하나, 이후 2차 세계대전 당시 이름을 날렸던 일본군 자살 특공대를 지칭하게 되었다) 덕분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곧 신이 도왔다는 의미입니다. 하여튼 일본으로서는 그 강력한 침략군을 태풍이 막아주었으니 천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역사 교과서에서도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한번 생각을 바꿔서 이렇게 질문해보지요. 그런 엄청난 세계사적인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실패의 원인을 태풍이라고 한다면 너무 단순한 설명 아닐까요? 태풍이 실제 실패의 원인이었다면, 몇 년 쉬어 힘을 모았다가 다시 선단을 만들어서 이번에는 태풍이 안 부는 계절에 공략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일본에서는 다시 몽골이 쳐들어올까봐 해안선을 방비하느라고 엄청난 공력을 들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몽골은 다시 일본에 쳐들어가지 못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몽골은 한 두 번의 실패 이후 일본을 정벌하려는 생각을 다시 하지 못했을까요?

고려 때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고려가 비록 몽골에게 사위의 나라로서 복속하게 되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걸린 기간이 30년입니다. 몽골 앞에서 30년 동안 버틴 세력은 고려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천하의 몽골이라고 하더라도 고려를 지배한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힘이 소진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힘을 모아 일본을 공격했다가 실패로 돌아가자 그 이후에는 다시 시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최근 일본 학계에서는 “한반도가 일본의 방파제 역할을 해줬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사례들을 놓고 한반도의 역사적 의의를 종합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해양 세력이 대륙으로 진출할 때나 혹은 반대로 대륙 세력이 해양으로 진출할 때 모두 한반도가 역사적 필터 역할을 했습니다.

이와 유사한 역사적 사례가 6.25 전쟁입니다. 중국과 미국의 수교를 뒤에서 실제 조정한 전략가로서 헨리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라는 유명한 미국의 정치학자가 있습니다. 그의 저서 ‘헨리 키신저의 세계 질서(World order)’를 보면 6.25 전쟁에 대한 분석을 하는데, 내용인즉 이렇습니다. 국군과 연합군이 북한군에게 한번 밀렸다가 다시 치고 올라갈 때 “압록강까지 올라가지 말고 평양-원산 선에서 멈추고 그곳에서 영토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당시 중국 사정을 생각해봅시다. 중국은 공산 정권이 들어선지 얼마 안 돼 아직 정권이 매우 취약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일본과 한국, 대만, 필리핀 등지에 미국의 강력한 군사력이 중국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니, 중국으로서는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더니 미군이 주축이 되어 강력한 기세로 밀고 올라오고 있습니다. 중국 측이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지요. 이에 마오쩌둥(毛澤東)이 미국 측에 암시적으로 경고합니다.

“압록강까지 오지 마라. 만약 이곳을 넘어오면 우리가 반드시 거병해서 맞받아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공연히 중국을 자극해 중국군을 끌어들일 이유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평양-원산 선에서 진격을 멈추면 한반도의 80퍼센트를 지배하는 셈이데, 힘이 약해진 북한 정권이 지배하는 나머지 20퍼센트는 결국 흡수됨으로써 통일을 이룰 수 있었으리라는 분석입니다. 물론 키신저의 이런 분석이 꼭 맞는다는 보장은 없고 많은 비판이 가능하겠습니다만, 한번 생각해볼 가치가 있는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 역시 중국군이 대거 반격을 해오리라는 예상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끝까지 전진을 명령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사실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중에 해임되고 나서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국이 가지고 있는 원자탄을 만주에 떨어뜨려 초토화시킴으로써 확실하게 끝내줄 생각이었다.”

실제 그런 일이 벌어졌으면 어떻게 됐을까요(한때 핵폭탄을 실제로 사용하기 위해 아홉 발을 괌 기지까지 이송했다고 하니 꼭 빈말만은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당시에는 중국 뒤에 소련이 있고 소련 역시 이미 핵무기를 가지고 있었으니 한반도는 핵전쟁 무대가 됐을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입니다. 너무나 위험한 발상을 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렇기에 트루먼(Harry Shippe Truman) 대통령이 맥아더를 원자탄만큼 위험한 인간이라고 칭하며 해임한 것이지요. 이상의 여러 가지 사례를 종합해보면 한반도라고 하는 지형이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이 만나는 일종의 단층선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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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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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부산은 나에게 비즈니스(business) 도시로 남아있다. 매번 출장으로 다녀갔다. 반나절도 못되는 시간만 부산에 있다가 할 일만 마치고 바로 상경하고는 했다. KTX나 비행기를 탔지만 이동하는 시간마저도 아까웠다. 기내에서 객차에서도 키보드를 두드리곤 했다. 이번엔 크게 마음을 먹고 무궁화호 열차표를 끊었다. 휴가 때만이라도 ‘철저히 느린 삶’을 살겠노라 다짐한 것이다. 그랬더니 평소엔 그냥 스쳤던 이런저런 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02. 무궁화호 승객 표를 검사하고 승하차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분들의 정식직함은 과장도, 차장도, 부장도, 상무도 아닌 ‘여객전무‘다. 모르긴 몰라도 KTX나 비행기에서 여객서비스를 하시는 분들보다 훨씬 직급이 높을 것이다. 콧대도 무척 세보였다. 객차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리고 빠져나갈 때 절대 머리 숙여 인사하는 법이 없다. 하긴 KTX 승무원들이 다른 객차로 갈 때 일부러 돌아서서 까딱 고개 숙이는 제스처가 영혼없는 매너라는 생각이 예전부터 들긴 했다.

#03. 무궁화호는 느리다. 서울-용산-영등포-수원-오산-평택-천안-조치원-신탄진-대전-옥천-영동-김천-구미-왜관-대구-동대구-밀양-구포-부산. 다 선다. 달리는 시간보다 서있는 시간이 더 길지 않을까. 최고속도는 120km/h이지만 체감상 100km/h 남짓의 속도로 운행하는 것 같다. 이 덕분에 한여름 아름다운 강과 들판의 모습을 시야에 온전히 담을 수 있다. KTX 탔을 때는 불가능했던 일이다.

#04. 부산역 7번출구로 나와 걷다가 대로 안쪽으로 두세블럭을 가면 ‘불백(불고기백반)’을 파는 식당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처음엔 운전기사 분들을 위한 기사식당이었다고 하는데 ‘무한도전’ 같은 매스컴을 탄 이후로 손님은 주로 관광객들인 듯하다. 1인분에 7000원짜리 백반을 시키면 이런저런 반찬에 새빨간 양념이 된 불고기가 지글지글하니 나온다. 한그릇 뚝딱, 해치우는데 10분밖에 안 걸린 것 같다. 맛도 양도 가격도 다 좋은데 너무 짜다.

#05. 부산 초량역과 부산역을 지나 중앙역으로 뻗어있는 중앙대로 변 더불어민주당 부산광역시당 건물 맞은편엔 변호사 ‘곽규택’의 사무실이 있다. 그런데 간판이 참 특이하다. 한쪽 벽면에 큼직하게 그리고 나란히 ‘변호사 곽규택’과 ‘영화감독 곽경택’이라고 썼다. 이 사무실 곽변이 두 명인가 싶을 정도로 근엄하고 진지하게. 시골(?)에서 나고 자란 두 형제가 부산을 소재로 한 영화로 대박을 치고, 검찰 요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했으니 고향에 돌아와서는 주변에 자랑할 만 할 것이다.

#06. 식사 후 목적지는 영도(影島)로 정했다. 초량역 3번 출구 버스정류장에서 85번 버스를 타면 부산역과 남포동역을 지나 영도대교를 건너 영도로 갈 수 있다. 영도대교에서 바라보는 부산항과 시내 모습은 많은 배와 접안시설로 신산스럽지만 삶의 박진감과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영도 안에 들어선 버스는 육중한 무게를 견디며 동동동 언덕을 향한다. 6.25 피난시절 설움을 그대로 안고 있는 영도는 제법 높은 언덕배기에까지 주택이 들어차 있다.

#07. 영도에는 부산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오션뷰 카페 ‘블루즈홀릭’이 있다. 영도 서쪽 해안을 감싸도는 ‘절영로’에 있는데 사색을 즐길 수 있어 일품이다. 그런데 휴가 때만이라도 서울처럼 북적거리는 부산 바닷가엔 가지 않겠노라 다짐했건만 저녁 무렵에는 광안리에 가야할 것 같다. 오랫동안 고락을 함께 해온 친구들과 바다내음을 마시며 술잔을 부딪힐 생각이다. 바다에 술에 취하다보면 부산스러움 따위 신경도 쓰이지 않을 것이다.

2017. 8. 11. 부산 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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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와 의지적 낙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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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를 맞아 서점에 들렀다. 인문학 서가에서 책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해 역사가 바뀌다.’ 책 판매를 위한 도발적인 제목 같이 느껴졌지만 저자 이름이 아주 반가웠다. 주경철 지음. 학부 시절 감명깊게 들었던 수업이 떠올라서 책장을 넘겼다. 서론은 이렇다.

나는 무엇보다 인간사를 큰 차원에서 이해해보기를 권유하고 싶었다. 현대사회는 혼돈과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과학기술과 산업의 발전이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이런 변화는 한편으로 우리 삶을 훨씬 더 풍요롭게 해줄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부익부 빈익빈의 모순을 심화시킬 우려도 크다.

언론사 입사 이후 내 관심의 스케일은 동네 골목 한귀퉁이 정도에 불과했다. 1개월, 아니 하루 반나절에 이르는 시간이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의 전부였다. 대학원 진학 이후 내 지식의 반경은 그보다 더 작아졌는지 모른다. 선생님 관심의 스코프가 인류 모든 역사라는 사실이 존경스러웠다.

선생님 책은 콜럼버스의 정신세계를 해부함으로써 유럽문명이 아메리카와 아시아 대륙으로 팽창하게 된 이유에 대해 설명을 시도한다. 선생님에 따르면 콜럼버스의 항해 동기는 이렇다.

콜럼버스가 아시아로 향한 것은 평범한 항해가 아니다. 단순히 새로운 항로를 발견해서 돈을 벌겠다는 수준에서 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사실 아무리 돈에 대한 욕심이 넘친다고 해도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돈을 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저 먼 바다를 항해한다고 했을 때 콜럼버스가 가졌던 내면의 동기(motivation)에는 세속적인 요소와 함께 어떤 세계사적인 과업에 대한 의무감 같은 것이 동시에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책에 따르면 콜럼버스는 일종의 ‘의지적 낙관주의자’였던 것 같다. 콜럼버스는 꽤 많은 책을 읽고 주석을 달아놓았다. 콜럼버스가 집중적으로 주석을 단 부분, 즉 콜럼버스를 매료시킨 책 구절이 매우 흥미롭다. “지구는 굉장히 작다. 육지는 6이고 바다가 1이다”

콜럼버스는 조만간 스페인 출신의 새로운 다윗이 이슬람 세력을 최종적으로 눌러 이기고 새 예루살렘을 건설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 군대를 키우기 위한 자금은, 자신이 신대륙에서 발견할 금광이다. 콜럼버스는 이렇게 썼다. “현재 스페인 왕이 마지막 황제이시고 그분이 나를 선택해서 내 항해를 지원하여 아시아에 갔으니 약속된 금을 얻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콜럼버스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들만 믿었던 셈이다. 그리고 바로 콜럼버스 자신이 신대륙 발견이라는 역사적 소명을 성취해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한편 콜럼버스의 이름은 기독교 성인 중 하나인 ‘크리스토퍼’다. 크리스토퍼 성인의 가장 큰 특징은 예수를 안고 물을 건너 먼 곳으로 갔다는 점이다. 이름에 이 성인을 본받아 살겠다는 의지가 들어있다고 가정하면, 콜럼버스의 염원은 자신이 예수의 뜻을 저 멀리, 강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 먼 이국땅까지 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주경철 선생님은 이렇게 평가했다.

콜럼버스가 생각한 우주관에서 이 세상은 그저 물질적인 성격의 땅이 아니라 의미가 충만한 땅이다. 그가 아시아로 향한다는 것은 단순히 먼 이국으로 가는 정도가 아니라 신학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미 알고 있는 곳, 구약에서 이미 예약되어 있는 곳을 향해 인류의 꿈을 실현하려 가는 것이라고 콜럼버스는 스스로 의미부여를 했다. (중략) 물론 당대에 콜럼버스만이 이러한 중세의 종교적 세계관을 가진 것은 아니다. 사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실제 콜럼버스와 마찬가지로 서쪽 항해를 하면 아시아로 쉽게 갈 수 있으리라고 판단한 사람들도 없지 않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콜럼버스만이 그런 생각을 체계화시키고 또 실제로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동기에서 출발한 꿈이지만, 실제 새로운 항로를 기획해서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여서 결국 그것을 달성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원래 목표는 지금 시각에서 보면 어긋나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의 집요한 노력 덕분에 세계사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콜럼버스의 ‘의지적 낙관주의’는 유럽 세계의 아메리카 진출이라는 세계사적 족적을 남겼다. 콜럼버스의 황당한 내면 세계, 유럽 제국주의의 폭력성 등을 잠시 내려놓고 생각해보면, 그의 무모한 도전은 개인적으로는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말하는 앵무새, 즉 ‘Artificial Intelligence’을 향한 나의 연구도 아시아 대륙이라는 미지의 땅에 가려는 콜럼버스의 항해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 시작은 ‘내가 하면 된다’는 ‘의지적 낙관주의’일 것이다.

2017. 8. 10. 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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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식구, 그리고 밥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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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입학 후 제대로 된 첫 휴가를 맞아 오래간만에 소설과 에세이 책, 시집들을 꺼내들었다. 기자 생활을 본격 시작한 2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내 정신적 삶에 근간이 되었던 글들이다. 그런데 요즘 밥(이라 쓰고 ‘밥벌이’라 읽는다)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지, 이런 글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책갈피 끼우는 심정으로 정리해둔다. 2017. 8. 8. 전주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전경들이 점심을 먹는다. 외국대사관 담 밑에서, 시위군중과 대치하고 있는 광장에서, 전경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밥을 먹는다. 닭장차 옆에 비닐로 포장을 치고 그 속에 들어가서 먹는다. 된장국과 깍두기와 졸인 생선 한 토막이 담긴 식판을 끼고 두 줄로 앉아서 밥을 먹는다. 다 먹으면 신병들이 식판을 챙겨서 차에 싣고 잔반통을 치운다. 시위군중들도 점심을 먹는다.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준비해 온 도시락이나 배달시킨 자장면을 먹는다. 전경들이 가방을 들고 온 배달원의 길을 열어준다. 밥을 먹고있는 군중들의 둘레를 밥을 다 먹은 전경들과 밥을 아직 못 먹은 전경들이 교대로 둘러싼다. 시위대와 전경이 대치한 거리의 식당에서 기자도 짬뽕으로 점심을 먹는다. 다 먹고나면 시위군중과 전경과 기자는 또 제가끔 일을 시작한다. 밥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만이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줄 수가 있다. 밥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시위현장의 점심시간은 문득 고요하고 평화롭다.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시위군중의 밥과 전경의 밥과 기자의 밥은 다르지 않았다. 그 거리에서, 밥의 개별성과 밥의 보편성은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밥이 그러할 것이다. 김훈, ‘밥’에 대한 단상

明太 창난젓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뷔벼 익힌 것을 / 이 투박한 北關을 한없이 끼밀고 있노라면 / 쓸쓸하니 무릎은 꿇어진다 // 시큼한 배척한 퀴퀴한 이 내음새 속에 / 나는 가느슥히 女眞의 살내음새를 맡는다 // 얼근한 비릿한 구릿한 이 맛 속에선 / 까마득히 新羅 백성의 鄕愁도 맛본다 백석, 북관(전문)

비 오는 날이면 요즈음도 나는 수제비가 먹고 싶어진다. 그건 아마 어린 날의 메밀칼싹두기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벽촌의 비 오는 날의 적막감은 내가 아직 맛보지 못한, 그러나 장차 피할 수 없게 될 인생의 원초적인 고독의 예감과도 같은 것이었다. (중략) 그때만 해도 한가족끼리도 아래위 서열에 따라 음식 층하가 없을 수 없는 시대였지만 메밀칼싹두기만은 완벽하게 평등했다. 할아버지 상에 올릴 칼싹두기라고 해서 특별한 꾸미를 얹는 일도 없었지만 양까지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막대접으로 한 대접씩 평등했다. 한 대접으로는 출출할 장정이나 머슴은 찬밥을 더 얹어먹으면 될 것이고, 한 대접이 벅찬 아이는 배를 두들겨 가며 과식을 하게 될 것이나 금방 소화가 되어 얹히는 일이 없었다. 땀 흘려 그걸 한 그릇씩 먹고 나면 뱃속뿐 아니라 마음속까지 훈훈하고 따뜻해지면서 좀전의 고적감은 눈녹듯이 사라지고 이렇게 화목한 집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는 기쁨인지 감사인지 모를 충만감이 왔다. 칼싹두기의 소박한 맛에는 이렇듯 각기 외로움 타는 식구들을 한 식구로 어우르고 위로하는 신기한 힘이 있었다. (하략) 박완서, 이 세상에 맛없는 음식은 없다

아무래도 오늘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다는 / 전화를 받고 역으로 달려갔다. / 배가 고팠다. / 죽음의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느낀 것이 시장기라니. / 불경스럽다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배가 고팠다. / 기차시간을 기다리며 허겁지겁 먹어치운 / 국밥 한 그릇. / 벌건 국물에 잠긴 흰 밥알을 털어넣으며 / 언젠가 부관(不棺)을 지켜보던 산비탈에서 / 그분이 건네주신 국밥 한 그릇을 떠올렸다. / 그를 만난 것은 주로 장례식에서였다. / 초상 때마다 호상(護喪)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가 /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온 그가 / 이제는 고단한 몸을 뉘고 숨을 내려놓으려 한다. / 잘 비워낸 한 생애가 천천히 식어가는 동안 / 그가 마지막으로 건네는 국밥 한 그릇을 / 눈물도 없이 먹어치웠다. / 국밥에는 국과 밥과 또 무엇이 섞여 있는지, / 국밥 그릇을 들고 사람들이 /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둘러 삼키려는 게 무엇인지, / 어떤 찬도 필요치 않은 이 가난한 음식을 / 왜 마지막으로 베풀고 떠나는 것인지, / 나는 식어가는 국밥그릇을 쉽게 내려놓지 못했다. 나희덕, 국밥 한 그릇

(전략) 나는 양념간장을 듬뿍 넣고 잘 저은 다음 묵밥을 입에 넣었다. 그 맛은, 정말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맛이었다. 육수에서는 윤기가 돌아 허한 느낌을 줄여주었고 고추 덕분에 매콤했다. 묵은 이와 싸울 생각이 없는 듯 사락사락 입속에서 놀다가 목으로 술술 잘 넘어갔다. 무엇보다 간이 잘 맞았다. 값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주 쌌다. 2,500원쯤? 그로부터 약 한 달 뒤, 나는 서울에서 온 진객을 맞아 이 고장의 진정한 향토음식을 맛보여주겠노라고 큰소리를 치며 묵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경기도의 길은, 말 그대로 왕도의 터(畿)가 될 농토 사이로 종횡무진 나 있어서, 제갈량의 팔진도인 양 복잡했고 지역의 토산물인 안개로 도무지 묵밥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백배사죄하며 다음에는 꼭 그집을 찾아내겠노라고, 다음에 꼭 오시라고 빌었다. 손님은 묵밥이라니, 그게 뭐 대단한 음식이겠느냐고 나를 위로하는 건지 우습게 보는 건지 모를 말을 하고는 표표히 떠나가서 다시는 오지 않았다. 그 뒤에 나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묵밥이라는 간판을 내건 음식점에 들어가 묵밥을 먹었다. 산뜻하고 깔끔했다. 그렇지만 내가 아는 그 맛, 식구끼리 해먹는 그 맛은 아니었다. 더 이상 그 집을 찾지 않을 생각이다. 어쩌면 없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 집을 원조라고 나는 생각한다. 원조라고 주장할 만한 이유가 없고 그럴 생각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만든 음식, 묵밥. 그 묵밥의 원조를 나는 맛보았다. (하략) 성석제, 묵밥을 먹으며 식도를 깨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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