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의 주어와 주제
11 Jul 2017 | syntax
이번 글에서는 한국어의 주어와 주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글은 고려대 정연주 선생님 강의와 ‘한국어문법총론1(구본관 외 지음, 집문당 펴냄)’을 정리했음을 먼저 밝힙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문장의 구조를 보는 두 가지 관점
문장의 구조는 단 한 가지의 관점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양한 관점에서 여러 가지 형식의 문장 구조를 상정할 수 있는데, 그중 한국어 문장의 구조를 설명하는 데 가장 유용한 관점은 크게 서술어를 중심으로 파악한 통사구조(syntactic structure)와 정보 전달의 방식을 중심으로 파악한 정보구조(information structure)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통사구조
전자의 관점은 서술어와 주어 사이의 문법적 관계에 주목합니다. 통사구조의 정확한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서술어가 요구하는 성분의 수와 종류의 정보에 따라 구축된 문형과 여러 통사적 원리에 따라 부가된 성분이 형성한 구조
‘진이는 밥을 먹어’라는 문장을 이 관점에 입각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습니다.
[진이는 [밥을] 먹어]]]
주어 + 목적어 + 서술어
여기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목적어-서술어’가 ‘주어-서술어’보다 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서술어가 가리키는 행위(食)가 지속될 수록 대상(rice)은 변화하게 마련이고, 주체가 그 행위를 마치는 순간 대상은 사라집니다. 하지만 주체(진이)는 행위가 종료되더라도 존재합니다. 즉 이 문장에서 서술어는 주어보다는 목적어와 의미적으로 더 큰 관련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 때문에 [먹어]라는 동사는 [밥을]이라는 명사구(Noun Phrase)와 우선 결합하고, 이후 [밥을 먹어]라는 동사구(Verb Phrase)에 [진이는]이라는 명사구가 결합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정보구조
후자의 관점은 문장 내 요소들이 얼마나 ‘정보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주목합니다. 정보구조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문장에서 정보 전달의 대상(구정보)과 그 주제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신정보)이 실현되는 방식의 구조
정보구조 관점에서 문장 구조를 분석해보겠습니다.
A: 진이는 뭐해?
B: [진이는] [밥을 먹어]
B에서 [진이는]은 질문한 사람도, 대답하는 사람도 모두 알고 있는 ‘구정보’입니다. 반면 [밥을 먹어]는 질문자는 모르는 ‘신정보’입니다.
구정보, 신정보
그렇다면 ‘정보가 새롭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크게 두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첫째는 ‘언어표현에 대응되는 지시대상(referent)이 청자의 마음 속에서 얼마나 친숙한가’를 놓고 따집니다. 해당 요소가 청자의 마음 속에서 활성화되어 있다면 (지시적)구정보, 화자의 발화를 듣고서야 비로소 활성화되기 시작했다면 (지시적)신정보입니다.
둘째 기준은 문장 내 구조를 놓고 따지는 겁니다. 문장은 대개 $X$와 $Y$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이 문장은 $X$에 대한 것이고 $Y$는 $X$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부분입니다. 이 때 $X$는 $Y$와의 관계 속에서 구정보이고, $Y$는 $X$에 대하여 단언되거나 질문되는 새로운 정보입니다. $X$를 주제(topic) 또는 (관계적)구정보, $Y$를 평언(comment) 또는 (관계적)신정보라고 합니다.
이 글에서는 용어를 다음과 같이 쓰겠습니다. 지시적인 구정보/신정보를 언급할 때는 아래 용어들과는 별도로 구분할 예정입니다.
구정보=관계적 구정보=주제(topic)
신정보=관계적 신정보=평언(comment)
한국어에서 극단적으로는 다음 예문처럼 문장 전체가 신정보로만 되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보구조 관점에선 B 문장 전체를 한 단위로 분석합니다. B처럼 구정보와 신정보로 나눌 수 없는 문장을 ‘제언문’이라 하며, 한국어에서는 제언문의 주어가 ‘이/가’로 실현됩니다.
A: 무슨 일이야?
B: [진이가 넘어졌어]
다른 예문을 보겠습니다.
[비가 온다]
위 문장은 ‘비’에 대해 어떤 정보를 언급한다고 하기보다는 비가 온다는 정보 전체를 통째로 언급하는 문장입니다. 위 예문에 주제는 명시돼있지 않지만, 굳이 말하자면 ‘기상 현상’입니다. 위 예문은 기상 현상에 대해 말하는 문장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를 ‘주제+평언’ 구조로 바꾸려면 아래 예문과 같이 한국어에서 주제를 나타내는 데 전형적으로 쓰이는 표지(marker)인 보조사 ‘-은/는’을 반드시 써야 합니다. 아래 예문에서 ‘비는’이 주제, ‘온다’가 평언이 됩니다.
[비는] [온다]
한국어에서는 화자가 어떤 대상에 대해 어떤 사실을 언급하려고 한다면, 그 대상은 모두 주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문을 보겠습니다.
(가) [영희는] [착해요]
(나) [순희도] [착해요]
(가)의 ‘영희는’은 화자가 언급하려고 하는 대상이므로 주제입니다. 그런데 (나)에서는 ‘-은/는’이 결합되지 않은 ‘순희도’가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순희도’에서는 보조사 ‘-도’가 지닌 also/too의 의미가 덧붙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 주제는 정보구조적 ‘의미’로 파악하는 것이지 표지 ‘-은/는’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주제의 종류
인가주제(ratified topic)이란 이미 이전 담화에서 주제로 확립되어 있는 요소를 가리킵니다. 관계적으로나 지시적으로나 구정보에 해당합니다. 한국어에서 인가주제는 ‘은/는’으로 표시되거나 아예 생략되는 일이 많습니다. 아래 예문에서 ‘아이들은’이 인가주제입니다.
A: 아이들은 뭐해?
B: (아이들은) 밥 먹어.
비인가주제(unratified topic)란 담화에서 현재 발화에 의해 새로 도입되어 이제야 막 주제로서 확립된 요소를 나타냅니다. 관계적으로는 구정보이나, 지시적으로는 신정보에 해당합니다. (1)처럼 ‘명사+말이야/말이에요/말입니다/말씀입니다/말인데요/말씀인데요 등’으로 실현되거나 (2)처럼 ‘있잖아(요)/있지/있죠/요’로 실현됩니다. 아래 예문에서 ‘박 사장’이 비인가주제입니다.
(1) 박 사장 말이야, 정말 열 받게 만든다. 나를 일하는 기계로 생각하나 봐.
(2) 박 사장 있잖아요, 어제 고혈압으로 쓰러졌대요.
대조주제(contrastive topic)는 주제이되 둘 이상이 서로 대조를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어에서 대조주제는 ‘은/는’으로 실현됩니다. 다음 예문과 같습니다.
A: 영이랑 순이 출산했니?
B: 응, 영이는 아들을 낳았고, 순이는 딸을 낳았어.
초점
초점(focus)은 문장이 나타내는 정보의 핵심을 나타냅니다. 주제와 짝을 이루는 평언 전체가 초점일 수도 있고, 평언 내부의 특정 성분만이 초점일 수도 있습니다. 예문을 보겠습니다.
A: 브라질은 어떤 나라야?
B: 브라질은 [축구를 잘해].
B에서 주제는 ‘브라질은’이고 평언은 ‘축구를 잘해’입니다. 하지만 초점은 ‘축구를 잘해’라는 평언 전체입니다. 다른 예문을 보겠습니다.
C: 축구 어디가 잘하지?
D: 축구는 [브라질이 잘해].
D에서 주제는 ‘축구는’이고 평언은 ‘브라질이 잘해’입니다. 하지만 초점은 ‘브라질이’라는 평언의 일부 성분입니다.
초점의 종류
정보초점(informational focus)이란 주제에 대해 제공되는 정보를 가리킵니다. 한국어에서 정보초점은 ‘이/가’로 실현됩니다.
A: 이거 누가 만들었니?
B: 진이가 만들었어.
대조초점(contrastive focus)이란 초점 요소와 대안 집합의 다른 원소들 사이에 대조가 부각되는 경우 해당 초점을 가리킵니다. 여기에서 대안집합이란 어떤 요소가 나타난 위치에 올 수 있는 여러 후보들의 집합입니다. 한국어에서 대조초점은 ‘은/는’이나 ‘이/가’로 실현됩니다.
A: 철수 데리러 엄마가 왔어 아빠가 왔어? B: 엄마가 왔어.
A: 이번에 시험 친 친구들 중 누가 합격했니? B: 철수는 합격했어.
주어의 정보적 역할에 따른 표시방식
통사 구조상 주어로 분석될 수 있는 문장성분도 정보구조 관점에서 보면 정보적 역할이 문장마다 달라질 겁니다. 주어의 정보적 역할에 따른 표시방식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은/는
이/가
인가 주제
정보 초점
대조 주제
대조 초점
대조 초점
제언문의 주어
한편 정보구조상의 주제가 통사 구조상의 주어와 일치하면 일반적으로 주제 표지 ‘-은/는’만을 사용하고 주어 표지 ‘-이/가’는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주어중심언어
주어는 ‘무엇이 어찌하다’, ‘무엇이 어떠하다’, ‘무엇이 무엇이다’와 같은 문장에서 ‘무엇이’에 해당하는 걸 말합니다. 즉 주어는 문장의 통사구조에서 문장이 나타내는 행위/작용의 주체, 상태/성질이나 정체 밝힘 등의 대상이 언어적으로 나타난 것을 가리킵니다. 한국어에서 주어는 일반적으로 주격조사 ‘-이/가’가 붙어 표시됩니다.
문법적인 주어가 문장 구성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언어를 ‘주어중심언어’라고 합니다. 영어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주어가 생략되기 어려우며 주어가 의미적으로 굳이 필요 없는 경우에도 허사주어를 반드시 써야 합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It rains (비가 온다)
주제중심언어
한국어는 ‘주제’도 중요하고 ‘주어’도 중요한 주제-주어 동시 부각형 언어(topic-subject prominent language)라고 합니다. 한국어에서 전형적인 주제 표지인 ‘-은/는’이 표시되어 문두에 나타난 예시를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ㄱ) 그 책은 나도 읽어 봤어
(ㄴ) 어제는 하루 종일 집에서 쉬었어
(ㄷ) 진이는 내가 벌써 저녁을 사줬어
(ㄹ) 향기는 장미가 더 좋지
(ㅁ) 읽기는 아무래도 이 책이 더 쉽다
위 예시의 볼드 표시 어절은 모두 통사구조상의 주어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ㄱ)만 예로 들면 ‘그 책은’은 통사구조상 목적어로 쓰였습니다. 다른 예를 살펴볼까요?
(ㅂ) (음식점에서 주문할 때) 저는 짜장면이요
(ㅂ)에서 ‘나는’은 ‘짜장면(이다)’의 주어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말하는 짜장면이 있을리가 없잖아요. 이 때 ‘저는’은 주제에 해당하며 실제 주어는 상황 맥락에 따라 생략됐다고 분석하는 것이 매끄럽습니다. (ㅂ)을 통사구조로 분석해 ‘저는’의 문장성분을 굳이 따지자면 부사어에 해당할 것입니다. ‘나는’을 생략해도 문장이 성립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서술어가 요구하는 필수부사어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주제-주어 동시 부각형 언어인 한국어의 통사적 특징을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1) ‘주제+평언’ 관계에 기초해 조직되는 문장이 많습니다.
(2) 주제가 될 수 있는 성분에 대한 제약이 적습니다.
(3) 주제가 문장 구성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4) 주제는 표면상 일정하게 표시됩니다.
(5) 주어는 생략 가능하고, 허사주어가 필요 없습니다.
(6) 이중주어 구문이 발달했습니다.
이중주어 문제
한국어에서 무엇을 주어로 해야할지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이견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대개 아래 예문과 같은 이중주어문의 해석과 관련이 있습니다.
(1) 누나는 눈이 크다.
(1)은 정보구조 관점에서 ‘주제+주어+서술어’로 분석할 수도 있고, 통사구조 관점에서 ‘주어+[주어+서술어]’로 분석할 수도 있습니다. 후자의 분석에서 [주어+서술어] 형태인 ‘눈이 크다’는 전체 문장의 서술어로서 절의 형식을 띠고 있으므로 서술절이라고 부릅니다.
다른 예문을 보겠습니다.
(2) 나는 호랑이가 무섭다.
(2)도 (1)처럼 정보구조 관점에서 ‘주제+주어+서술어’로 분석할 수도 있고, 통사구조 관점에서 ‘주어+[주어+서술어]’로 분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후자의 분석은 문제가 있습니다.
‘무섭다’의 대상은 ‘호랑이’이고 ‘나’는 ‘무섭다’라는 심리상태를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형용사는 그 성질이나 상태를 지니는 대상이 주어이므로, (2)에서 ‘나는’은 주어가 될 수 없습니다.
이때 ‘나는’은 바로 주제가 됩니다. 다시 말해 화자는 ‘나’라는 대상에 어떤 정보(호랑이가 무섭다)를 전달하고 있다고 분석하는 것이 매끄럽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통사구조 관점에서 문장을 분석할 때 ‘나는’이 주어가 아니라면, ‘나는’은 대체 어떤 문장성분(sentence component)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보구조상 주제는 서술어가 요구하는 문장성분이 아닌 경우도 많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통사구조와 정보구조는 엄밀히 말하면 별개의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통사구조 관점에서 ‘나는’의 문장 성분을 굳이 따진다면 부사어 정도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아래와 같은 문장은 통사구조보다는 정보구조 틀로 설명하는 것이 편리합니다. 아래 예시에서 ‘꽃은’, ‘장미가’, ‘생선은’이 주제가 됩니다.
꽃은 장미가 향기가 좋아요
생선은 도미가 맛있다.
이번 글에서는 한국어의 주어와 주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글은 고려대 정연주 선생님 강의와 ‘한국어문법총론1(구본관 외 지음, 집문당 펴냄)’을 정리했음을 먼저 밝힙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문장의 구조를 보는 두 가지 관점
문장의 구조는 단 한 가지의 관점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양한 관점에서 여러 가지 형식의 문장 구조를 상정할 수 있는데, 그중 한국어 문장의 구조를 설명하는 데 가장 유용한 관점은 크게 서술어를 중심으로 파악한 통사구조(syntactic structure)와 정보 전달의 방식을 중심으로 파악한 정보구조(information structure)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통사구조
전자의 관점은 서술어와 주어 사이의 문법적 관계에 주목합니다. 통사구조의 정확한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서술어가 요구하는 성분의 수와 종류의 정보에 따라 구축된 문형과 여러 통사적 원리에 따라 부가된 성분이 형성한 구조
‘진이는 밥을 먹어’라는 문장을 이 관점에 입각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습니다.
[진이는 [밥을] 먹어]]]
주어 + 목적어 + 서술어
여기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목적어-서술어’가 ‘주어-서술어’보다 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서술어가 가리키는 행위(食)가 지속될 수록 대상(rice)은 변화하게 마련이고, 주체가 그 행위를 마치는 순간 대상은 사라집니다. 하지만 주체(진이)는 행위가 종료되더라도 존재합니다. 즉 이 문장에서 서술어는 주어보다는 목적어와 의미적으로 더 큰 관련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 때문에 [먹어]라는 동사는 [밥을]이라는 명사구(Noun Phrase)와 우선 결합하고, 이후 [밥을 먹어]라는 동사구(Verb Phrase)에 [진이는]이라는 명사구가 결합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정보구조
후자의 관점은 문장 내 요소들이 얼마나 ‘정보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주목합니다. 정보구조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문장에서 정보 전달의 대상(구정보)과 그 주제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신정보)이 실현되는 방식의 구조
정보구조 관점에서 문장 구조를 분석해보겠습니다.
A: 진이는 뭐해?
B: [진이는] [밥을 먹어]
B에서 [진이는]은 질문한 사람도, 대답하는 사람도 모두 알고 있는 ‘구정보’입니다. 반면 [밥을 먹어]는 질문자는 모르는 ‘신정보’입니다.
구정보, 신정보
그렇다면 ‘정보가 새롭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크게 두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첫째는 ‘언어표현에 대응되는 지시대상(referent)이 청자의 마음 속에서 얼마나 친숙한가’를 놓고 따집니다. 해당 요소가 청자의 마음 속에서 활성화되어 있다면 (지시적)구정보, 화자의 발화를 듣고서야 비로소 활성화되기 시작했다면 (지시적)신정보입니다.
둘째 기준은 문장 내 구조를 놓고 따지는 겁니다. 문장은 대개 $X$와 $Y$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이 문장은 $X$에 대한 것이고 $Y$는 $X$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부분입니다. 이 때 $X$는 $Y$와의 관계 속에서 구정보이고, $Y$는 $X$에 대하여 단언되거나 질문되는 새로운 정보입니다. $X$를 주제(topic) 또는 (관계적)구정보, $Y$를 평언(comment) 또는 (관계적)신정보라고 합니다.
이 글에서는 용어를 다음과 같이 쓰겠습니다. 지시적인 구정보/신정보를 언급할 때는 아래 용어들과는 별도로 구분할 예정입니다.
구정보=관계적 구정보=주제(topic)
신정보=관계적 신정보=평언(comment)
한국어에서 극단적으로는 다음 예문처럼 문장 전체가 신정보로만 되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보구조 관점에선 B 문장 전체를 한 단위로 분석합니다. B처럼 구정보와 신정보로 나눌 수 없는 문장을 ‘제언문’이라 하며, 한국어에서는 제언문의 주어가 ‘이/가’로 실현됩니다.
A: 무슨 일이야?
B: [진이가 넘어졌어]
다른 예문을 보겠습니다.
[비가 온다]
위 문장은 ‘비’에 대해 어떤 정보를 언급한다고 하기보다는 비가 온다는 정보 전체를 통째로 언급하는 문장입니다. 위 예문에 주제는 명시돼있지 않지만, 굳이 말하자면 ‘기상 현상’입니다. 위 예문은 기상 현상에 대해 말하는 문장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를 ‘주제+평언’ 구조로 바꾸려면 아래 예문과 같이 한국어에서 주제를 나타내는 데 전형적으로 쓰이는 표지(marker)인 보조사 ‘-은/는’을 반드시 써야 합니다. 아래 예문에서 ‘비는’이 주제, ‘온다’가 평언이 됩니다.
[비는] [온다]
한국어에서는 화자가 어떤 대상에 대해 어떤 사실을 언급하려고 한다면, 그 대상은 모두 주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문을 보겠습니다.
(가) [영희는] [착해요]
(나) [순희도] [착해요]
(가)의 ‘영희는’은 화자가 언급하려고 하는 대상이므로 주제입니다. 그런데 (나)에서는 ‘-은/는’이 결합되지 않은 ‘순희도’가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순희도’에서는 보조사 ‘-도’가 지닌 also/too의 의미가 덧붙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해 주제는 정보구조적 ‘의미’로 파악하는 것이지 표지 ‘-은/는’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주제의 종류
인가주제(ratified topic)이란 이미 이전 담화에서 주제로 확립되어 있는 요소를 가리킵니다. 관계적으로나 지시적으로나 구정보에 해당합니다. 한국어에서 인가주제는 ‘은/는’으로 표시되거나 아예 생략되는 일이 많습니다. 아래 예문에서 ‘아이들은’이 인가주제입니다.
A: 아이들은 뭐해?
B: (아이들은) 밥 먹어.
비인가주제(unratified topic)란 담화에서 현재 발화에 의해 새로 도입되어 이제야 막 주제로서 확립된 요소를 나타냅니다. 관계적으로는 구정보이나, 지시적으로는 신정보에 해당합니다. (1)처럼 ‘명사+말이야/말이에요/말입니다/말씀입니다/말인데요/말씀인데요 등’으로 실현되거나 (2)처럼 ‘있잖아(요)/있지/있죠/요’로 실현됩니다. 아래 예문에서 ‘박 사장’이 비인가주제입니다.
(1) 박 사장 말이야, 정말 열 받게 만든다. 나를 일하는 기계로 생각하나 봐.
(2) 박 사장 있잖아요, 어제 고혈압으로 쓰러졌대요.
대조주제(contrastive topic)는 주제이되 둘 이상이 서로 대조를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어에서 대조주제는 ‘은/는’으로 실현됩니다. 다음 예문과 같습니다.
A: 영이랑 순이 출산했니?
B: 응, 영이는 아들을 낳았고, 순이는 딸을 낳았어.
초점
초점(focus)은 문장이 나타내는 정보의 핵심을 나타냅니다. 주제와 짝을 이루는 평언 전체가 초점일 수도 있고, 평언 내부의 특정 성분만이 초점일 수도 있습니다. 예문을 보겠습니다.
A: 브라질은 어떤 나라야?
B: 브라질은 [축구를 잘해].
B에서 주제는 ‘브라질은’이고 평언은 ‘축구를 잘해’입니다. 하지만 초점은 ‘축구를 잘해’라는 평언 전체입니다. 다른 예문을 보겠습니다.
C: 축구 어디가 잘하지?
D: 축구는 [브라질이 잘해].
D에서 주제는 ‘축구는’이고 평언은 ‘브라질이 잘해’입니다. 하지만 초점은 ‘브라질이’라는 평언의 일부 성분입니다.
초점의 종류
정보초점(informational focus)이란 주제에 대해 제공되는 정보를 가리킵니다. 한국어에서 정보초점은 ‘이/가’로 실현됩니다.
A: 이거 누가 만들었니?
B: 진이가 만들었어.
대조초점(contrastive focus)이란 초점 요소와 대안 집합의 다른 원소들 사이에 대조가 부각되는 경우 해당 초점을 가리킵니다. 여기에서 대안집합이란 어떤 요소가 나타난 위치에 올 수 있는 여러 후보들의 집합입니다. 한국어에서 대조초점은 ‘은/는’이나 ‘이/가’로 실현됩니다.
A: 철수 데리러 엄마가 왔어 아빠가 왔어? B: 엄마가 왔어.
A: 이번에 시험 친 친구들 중 누가 합격했니? B: 철수는 합격했어.
주어의 정보적 역할에 따른 표시방식
통사 구조상 주어로 분석될 수 있는 문장성분도 정보구조 관점에서 보면 정보적 역할이 문장마다 달라질 겁니다. 주어의 정보적 역할에 따른 표시방식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은/는 | 이/가 |
---|---|
인가 주제 | 정보 초점 |
대조 주제 | 대조 초점 |
대조 초점 | 제언문의 주어 |
한편 정보구조상의 주제가 통사 구조상의 주어와 일치하면 일반적으로 주제 표지 ‘-은/는’만을 사용하고 주어 표지 ‘-이/가’는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주어중심언어
주어는 ‘무엇이 어찌하다’, ‘무엇이 어떠하다’, ‘무엇이 무엇이다’와 같은 문장에서 ‘무엇이’에 해당하는 걸 말합니다. 즉 주어는 문장의 통사구조에서 문장이 나타내는 행위/작용의 주체, 상태/성질이나 정체 밝힘 등의 대상이 언어적으로 나타난 것을 가리킵니다. 한국어에서 주어는 일반적으로 주격조사 ‘-이/가’가 붙어 표시됩니다.
문법적인 주어가 문장 구성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언어를 ‘주어중심언어’라고 합니다. 영어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주어가 생략되기 어려우며 주어가 의미적으로 굳이 필요 없는 경우에도 허사주어를 반드시 써야 합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It rains (비가 온다)
주제중심언어
한국어는 ‘주제’도 중요하고 ‘주어’도 중요한 주제-주어 동시 부각형 언어(topic-subject prominent language)라고 합니다. 한국어에서 전형적인 주제 표지인 ‘-은/는’이 표시되어 문두에 나타난 예시를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ㄱ) 그 책은 나도 읽어 봤어
(ㄴ) 어제는 하루 종일 집에서 쉬었어
(ㄷ) 진이는 내가 벌써 저녁을 사줬어
(ㄹ) 향기는 장미가 더 좋지
(ㅁ) 읽기는 아무래도 이 책이 더 쉽다
위 예시의 볼드 표시 어절은 모두 통사구조상의 주어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ㄱ)만 예로 들면 ‘그 책은’은 통사구조상 목적어로 쓰였습니다. 다른 예를 살펴볼까요?
(ㅂ) (음식점에서 주문할 때) 저는 짜장면이요
(ㅂ)에서 ‘나는’은 ‘짜장면(이다)’의 주어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말하는 짜장면이 있을리가 없잖아요. 이 때 ‘저는’은 주제에 해당하며 실제 주어는 상황 맥락에 따라 생략됐다고 분석하는 것이 매끄럽습니다. (ㅂ)을 통사구조로 분석해 ‘저는’의 문장성분을 굳이 따지자면 부사어에 해당할 것입니다. ‘나는’을 생략해도 문장이 성립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서술어가 요구하는 필수부사어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주제-주어 동시 부각형 언어인 한국어의 통사적 특징을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1) ‘주제+평언’ 관계에 기초해 조직되는 문장이 많습니다.
(2) 주제가 될 수 있는 성분에 대한 제약이 적습니다.
(3) 주제가 문장 구성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4) 주제는 표면상 일정하게 표시됩니다.
(5) 주어는 생략 가능하고, 허사주어가 필요 없습니다.
(6) 이중주어 구문이 발달했습니다.
이중주어 문제
한국어에서 무엇을 주어로 해야할지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이견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대개 아래 예문과 같은 이중주어문의 해석과 관련이 있습니다.
(1) 누나는 눈이 크다.
(1)은 정보구조 관점에서 ‘주제+주어+서술어’로 분석할 수도 있고, 통사구조 관점에서 ‘주어+[주어+서술어]’로 분석할 수도 있습니다. 후자의 분석에서 [주어+서술어] 형태인 ‘눈이 크다’는 전체 문장의 서술어로서 절의 형식을 띠고 있으므로 서술절이라고 부릅니다.
다른 예문을 보겠습니다.
(2) 나는 호랑이가 무섭다.
(2)도 (1)처럼 정보구조 관점에서 ‘주제+주어+서술어’로 분석할 수도 있고, 통사구조 관점에서 ‘주어+[주어+서술어]’로 분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후자의 분석은 문제가 있습니다.
‘무섭다’의 대상은 ‘호랑이’이고 ‘나’는 ‘무섭다’라는 심리상태를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형용사는 그 성질이나 상태를 지니는 대상이 주어이므로, (2)에서 ‘나는’은 주어가 될 수 없습니다.
이때 ‘나는’은 바로 주제가 됩니다. 다시 말해 화자는 ‘나’라는 대상에 어떤 정보(호랑이가 무섭다)를 전달하고 있다고 분석하는 것이 매끄럽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통사구조 관점에서 문장을 분석할 때 ‘나는’이 주어가 아니라면, ‘나는’은 대체 어떤 문장성분(sentence component)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보구조상 주제는 서술어가 요구하는 문장성분이 아닌 경우도 많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통사구조와 정보구조는 엄밀히 말하면 별개의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통사구조 관점에서 ‘나는’의 문장 성분을 굳이 따진다면 부사어 정도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아래와 같은 문장은 통사구조보다는 정보구조 틀로 설명하는 것이 편리합니다. 아래 예시에서 ‘꽃은’, ‘장미가’, ‘생선은’이 주제가 됩니다.
꽃은 장미가 향기가 좋아요
생선은 도미가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