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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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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기간 이것만은 꼭 읽으리라 다짐했던 책이 하나 있다. 김애란의 5년만의 신작 소설집 ‘바깥은 여름’. 대학 시절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를 읽고 무한 감동 모드에 빠져 있었던 지라 새 작품이 출간됐다는 소식에 무척 기뻤다.

김애란은 5년 전 소설의 주인공들이 현재 맞닥뜨리고 있는 삶의 문제들을 담담하게, 하지만 뼈아프게 그려낸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노량진 어느 편의점, 원룸, 학원을 전전하지 않는다. 결혼도 했고, 애도 낳았고, 집도 샀다.

그러나 빚과 가난에 쪼들린다는 점에서, 이른바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기 위해 아둥바둥한다는 점에서, 그러면서도 상실감이 그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삶은 5년 전과 비교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휴가 기간 책장을 넘기면서 소설의 흡입력과 재미에 감탄하면서도 너무나 현실적인 묘사에 가슴 한 구석이 아리기도 했다. 이 느낌을 잊지 않기 위해 인상 깊은 구절 몇 개를 정리해본다. 2017. 8. 11. 부산

한동안 집이 생겼다는 사실에 꽤 얼떨떨했다. 명의만 내 것일 뿐 여전히 내 집이 아닌데도 그랬다. 이십여 년간 셋방을 부유하다 이제 막 어딘가 가늘고 연한 뿌리를 내린 기분. (중략) 아내는 9급 공무원 시험에 세 번 응시해 세 번 떨어졌고, 공무원이 되는 대신 노량진 공무원 입시학원에서 사무를 봤다. 결혼 후 난임 치료를 받다 두 번의 유산 끝에 영우를 가졌고, 다섯 번의 이사 끝에 집을 샀다. 모두 지난 십 년간 정신없이 벌어진 일들이었다. 아파트를 얻은 뒤 아내는 휴일마다 베란다에서 계속 무언가를 자르고, 칠하고, 조립했다. (중략) 아내는 정착의 사실뿐 아니라 실감이 필요한 듯했다. 쓸모와 필요로만 이뤄진 공간은 이제 물렸다는 듯, 못생긴 물건들과 사는 건 지쳤다는 듯. 아내는 물건에서 기능을 뺀 나머지를, 삶에서 생활을 뺀 나머지를 갖고 싶어했다. ‘입동’

‘딱 한 잔만’ 하자던 술자리는 3차까지 이어졌다. 새벽 세시가 넘었을 즈음 테이블에 남은 사람은 이수와 동오뿐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다. 이수는 동오가 최근 커피숍을 냈다 망한 걸 알고 있었다. 직접 연락하지 않아도 그런 소문은 귀에 잘 들어왔다. 이수는 자기 근황도 그런 식으로 돌았을지 모른다고 짐작했다. 걱정을 가장한 흥미의 형태로, 죄책감을 동반한 즐거움의 방식으로 화제에 올랐을 터였다. 누군가의 불륜, 누군가의 이혼, 누군가의 몰락을 얘기할 때 이수도 그런 식의 관심을 비친 적이 있었다. 경박해 보이지 않으려 적당한 탄식을 섞어 안타까움을 표한 적 있었다. 그 자식 공부 잘했는데. 그러니까 걔기 그렇게 될 줄 어떻게 알았어. 인생 길게 봐야 하나봐. 누구는 벌써 부장 달았던데. 걔가 잘 풀릴 줄 아무도 몰랐잖아. 동일한 출발선을 돌아본 뒤 교훈을 찾고 줄거리를 복기할 입들이 떠올랐다. 그러다 어색한 침묵이 돌면 금방 다른 화제를 찾아내겠지. 어쩌면 다른 친구들도 이미 타인의 삶에 심드렁해진 지 오랜데 이수 혼자 그렇게 추측하는지 몰랐다. ‘건너편’

우편함에 각종 고지서와 전단지가 가득했다. 내 것과 남편 이름이 뒤섞인 종이 뭉치를 가슴에 안고 승강기에 올랐다. 그러곤 현관 앞에 서서 당신 것과 내 생일을 섞어 만든 비밀번호를 눌렀다. 한 달 남짓 집에 고인 미지근한 공기가 바깥바람과 만나 몸을 뒤척였다. 신발장 앞에 캐리어를 세워두고, 우편물을 부엌 식탁 위에 던진 뒤 안방으로 들어가 그대로 쓰러졌다. 고요하고 어둑한 안방에서 ‘우리집 냄새’가 났다. 당신과 같이 만든 냄새였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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